내가 하기 싫어도 하는 이유
재미 원툴보다는, 고통 속에서 즐거움 발견하기
살아가는 데 즐거운 일과 즐겁지 않은 일의 비율을 따져보자.
아마 즐거운 일이이 1% 내외, 즐겁지 않은 일이 99%를 차지할 것이다.
그렇다고 삶은 고통으로 가득 차있으니 빨리 세상을 떠나는 게 답이다- 같은 비관주의를 말하려는 게 아니라,
그런 삶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인간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생각해봐라.
즐거운 일이 1퍼센트 남짓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즐거운 기억을 붙들고 나머지 99퍼센트의 시간을 산다.
결국은 관점의 차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매사를 마냥 긍정적으로 살아야 한다’ 라는 주장에 마냥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긍정적으로 살기보다는, ‘부정적으로 인식하지 않기’에 가깝다. 체념보다는 마지못해 인정하는.
마냥 재미 하나를 찾으면서 삶을 살기보다는 어떤 (고통스러운) 일을 하든 간에 그 속에서 나름의-
그러니까 1퍼센트의 즐거움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누구나 할 법한 말이다. 긍정긍정하게 사는 사람들 보면 다 이런 얘기를 하고 다닌다.
근데 누구보다 현실적이고-냉소적이고-염세주의적인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면 꽤 범상치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런 범상치 않은 말을 이런 공개된 장소에서 내뱉게 되기까지의 계기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어쩔 수 없는 일임을 받아들이기
이런 인식을 가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수험생활이었다.
학생들에게 나름 신랄한 비판을 가하면서도, 문제를 나름 현실적으로 접근했던 H 모 강사가 생각난다.
가장 비슷한 말을 찾자면 ‘cynical + sarcastic + down to earth’ 정도가 있을 것이다.
아무튼 꽤나 동질감을 느꼈다. 내가 평소에 생각하던 바와 꽤 비슷한 이야기를 늘어놓더라.
그런데 그가 나름 희망찬?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가 있었다.
지금은 생각은 안나긴 하지만… 내가 학생들에게 말했던 내용들과 꽤 비슷한 부류의 것들이다.
아래에 그 내용을 간략하게 적어본다.
수험생활은 일종의 ‘도 닦기’이다.
재수학원에서 나오면 집에 가서 30분씩 게임을 하던 친구가 있었다. 나는 그걸 그리 좋게 보지는 않았다.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늘 할 일을 다했고, 하루를 리프레시하는 측면에서 이걸 하는 거다.
어차피 그 시간에 공부를 한다고 해서 효율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나는 그 말에 동의했다. 정말로. ‘논리적으로’는 틀린 말이 아니었으니까.
근데, ‘도 닦기’의 측면에서는 그렇지 않다.
스님이 오늘은 n시간 수행했으니까 삼겹살에 소주 한잔 해야지- 하는 거 본 적 있는가?
당연히 ‘그건 좀 아니지 않나?’ 소리가 나올 것이다.
수험생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논리적으로’ 봤을 때는 저 말이 나름 합리적이지만, ‘일반적인’ 인식으로 봤을 때는 ‘어찌 감히 재수생이 게임을?’이라는 생각을 할 법도 하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 N수를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대한 차이다. 구체적으로는 이 일련의 행위들을 ‘내재된 가치의 실현’으로 보냐, 아니면 ‘목적-수단’으로 보느냐에 대한 차이지만, 이 부분은 나중에 시간이 되면 다른 글에서 다뤄보도록 해보고...
러프하게 두 주장- ‘재수생이 어떻게 감히 (== 도 닦기 관점)’ 와 ‘논리적으로는 맞말’ 사이에 관점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만 이해해보자.
당시의 나는 (그리고 예시로 든 친구 역시) 후자의 관점을 채택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강사가 전자의 관점에 가까운- ‘수험생활은 도를 닦는 거나 마찬가지예요.’라는 말을 하니,
자연스럽게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저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닌데? 싶으니까.
나는 당시에는 후자의 관점이 ‘현실적으로 유용’하다고 여겼는데, 일련의 일들을 거치면서 생각이 좀 바뀌었다.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천재지변이나, 핸드폰을 박살낸다거나, 이어폰을 찜질방 바지 주머니에 놓고 나온다던가 하는 일들.
‘현실적인 인식’은 이러한 일들에 대해 ‘실질적으로 유용한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현실적인 인식을 해보자.
폭우는 왜 갑자기 내렸을까? 고온다습한 북태평양 기단과 저온다습한 기단이 만나 정체전선을 형성해서.
나는 왜 핸드폰을 떨어트렸을까? 갑작스러운 부딪힘에 의해 손에 힘이 풀려서.
나는 왜 이어폰을 두고 나왔을까? 전날 밤을 샌 상태에서 내 물건을 챙겨야 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해서.
이 셋이 이미 발생한 문제에 대한 유용한 변화를 만들어 내는가? 아니다.
재수생활도 그렇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수능을 못 보고 싶어서 못 봤겠는가.
수능을 이러이런 이유로 못 봤고, 수능을 이만큼 더 잘 보기 위해서는 (목표) 이런이런 공부를 해야 한다 (수단).
그러니 하루에 이만큼의 공부를 해야 한다- 이것들 모두 현실적인 인식이다.
다만, ‘또 다른 현실적인 인식’이 있다. ‘하루에 이만큼의 공부를 했으니, 남은 시간에는 다른 것을 해도 된다.’
목표를 달성한다는 관점에서 이러한 결론에 논리적인 문제가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현실적인 인식’은 우리에게 ‘할 일’에 대해서 말하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결국 어쩔 수 없는 일에는 어쩔 수 없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현실적인 접근으로는 이러한 ‘어쩔 수 없는 일’들을 수용할 수 없는 수많은 상황이 발생한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하루에 6시간 잠만 자고 자유 시간 없이 공부만 할 수 있죠?’
‘해야 할 일 다 했으면 그 시간에 낮은 효율로 공부하는 것보다는 쉴 수도 있지 않나요?’
‘주말 자습 꼭 나와야 되나요? 일주일 중 하루는 리프레시하는 날로 둬야 더 능률이 좋지 않을까요?’
‘하루에 신한테 기도해야 할 분량 다 끝냈으면, 내 의무를 다했으니 술 좀 마시면서 놀 수 있는 거 아닌가?’
어쩔 수 없다는 인식은 결국 구조적 부조리함에 대한 수용이다.
힘든 일이 있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견뎌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수험생활이라는 것 자체가 사실 학생들에게 굉장히 부조리한 일이다.
고3 일상은 다큐멘터리로도 꽤 자주 나오지 않는가.
물론 누가 칼들고 너한테 수능 치라고 협박했음? 이라고 물으면 할 말 없긴 한데,
요지는 학생들을 수험생활로 내모는 사회적 압력과 구조적 장치가 있다는 게 문제라는 것.
재수학원도 마찬가지다. 요즘 세상에 학생들을 하루종일 가둬놓고 핸드폰도 못 쓰게 하고 말도 못 하게 하는 게 과연 정상적인 일인가? 모두 일종의 ‘부조리’이고 부조리함에 대해서 현실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곧 수용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수용하지 않겠다는 것은 곧 분노한다는 것이다.
그게 나 자신에 대해서 어떤 ‘유용한 변화- 가령 입시 성공’을 만들어낼 수 있냐고 묻는다면, 글쎄다.
예전에 한창 밈으로 유행하던 ‘대학거부시위’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판단은 각자에 맡기도록 하겠다.
그래서, 결론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애초에 수험생활은 즐겁지 않은 일이다.
즐겁지 않은 일을 즐겁게 보내려고 하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기본적인 전제가 잘못됐다는 것.
‘도 닦기’는 이에 대한 적절한 비유다. 애초에 ‘고행’이다.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다.
힘들고 어려운 것을 벗어나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했었다. 굉장히 꼰대같지 않은가?
취미와 직업의 차이
이러한 인식은 내 진로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작가 지망생에서 개발자를 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그것도 글쓰는 것이 정말정말 즐거웠을 시기에 그걸 결정해야 했으니, 미련이 남을 수밖에 없다.
그 미련을 털어내게 해 준 것이 위의 생각과, 저번 에세이 대회에서 썼던 주제이기도 한,
‘취미와 직업’에 대한 인식이다.
사실 대부분의 내용은 그때 제출했던 작품에 들어가 있다.
전문을 첨부하고 싶지만, 공개된 블로그라 조금 민망하다.
그렇다고 새로 쓰기엔 상당히 귀찮은 일이므로, 일부만 인용하겠다.
쓸데없는 먼 미래의 고민이라고 생각했지만, 한번 들어앉은 불안감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좋아하는 일이라, 일단 좋아하는 일을 찾는 것도 문제지만,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것이 진정 나를 행복하게 만들까?
어른들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어떤 선생은 사진 찍는 것을 취미로 하는 한 친구가- 그는 그 아마추어 사진가가 자신의 결혼식 사진도 찍어주었다며, 그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직장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해 회사에 사표를 내고 사진관을 열었는데, 채 1년도 되지 않아 그 일을 때려치웠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이유인즉 손놈들의 별별 요구와 행패를 견디지 못한 나머지 폐업을 결심했다는 것.
그런가 하면 한 어떤 선생은 티비 프로그램인가에서 봤던 연구를 인용하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어른들의 절반 이상은 어렸을 적의 꿈과 다른 일을 하며 살고 있노라고.
요약하자면, ‘아무리 즐거운 취미더라도 일이 되면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라는 것.
정말 극소수의 사람들이 덕업일치를 이루기는 하지만 그게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건 누구나 알 것이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했다. ‘어차피 업이라는 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라면, 그냥 받아들이는 게 낫지 않을까?’
수험생활을 ‘도 닦기’로 인식했던 것처럼, 직업도 그러한 ‘어쩔 수 없는 일’ 내지는 ‘고행’으로 여기자는 것이다.
‘업으로 삼는다’라는 말에는 그만한 무게가 달려있으니까.
다만 이전 인식과 조금 달라진 점을 찾자면, ‘어차피 힘든 일이라면, 그 안에서 나름의 재미를 찾자’는 것.
취미는 하는 내내 즐겁다. 즐겁지 않을 때가 있더라도, 대부분은 즐거운 일이다.
직업은 하는 내내 즐겁지 않다. 즐거울 때가 있더라도, 대부분은 즐겁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하든 간에 그 안에서 나름의 즐거움을 찾는 것’이다.
나에게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그래서 작가를 버리고 개발자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프론트냐 백엔드이냐는 그닥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요즘에는 프론트 쪽이 더 적성이 맞지 않았나- 하는 고민도 든다.
그렇다고 그 고민이 나에게 크리티컬하게 작용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프론트로 가든 백엔드로 가든 거기서 열심히 하고 나름의 재미를 찾으면 그만이니까.
그래서 나름의 재미를 찾고 산다. 공부하다 보면 소소하게 재밌는 지점들이 많다.
마냥 나에게 해당되는 얘기만은 아닐 것이다. 다들 그렇게 산다.
이거 하나 말하자고 빌드업이 좀 길었다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다들 그렇게 사는 이유를 좀 수면 밖으로 꺼내보고 싶었다.
읽는 분들도 살면서 나름의 재미 포인트를 찾기를 바란다. 끝끝끝.